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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행 목사] 김일남 목사에게서 중학교 때부터 신앙에 영향을 받았다

서기행 목사는 중학교(학다리 중학교 1949~1552) 때부터 김일남(1551년 3월 목사 안수, 목포노회)에게서 신앙에 영향을 받았다.



서기행 목사의 어머니가 김일남 전도사를 집에 모시고 아버지 방에 주무시게 하였다. 그 당시 김일남 전도사는 51인 동지회가 펴낸 부수신학 잡지인 [불기둥]을 주었다. 불기둥은 1947년에 12월 9일에 창간한 기독교 신문이며 제4호부터 잡지로 발간되었고 1550년 폐간되었다. 서기행 목사는 이를 통하여 중학교 때부터 신신학이 무엇인지 알고 경계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규오, 엄두섭, 박요한, 김일남의 신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김일남 목사는 엄다교회를 개척했으며 영흥교회 등을 섬기고 1967년 2월 28일부터 목포제일교회를 시무하였다. 1979년 9월 교단이 분리될 때(64회) 합동보수 교단(개혁 측이라고 함)의 총회장이 되었다. 2005년 90회 총회에서 합동과 개혁이 합동(영입)할 때 개혁 측 회원 맨 앞장을 서서 총회에 입장하였다. 2008년에 향년 86세로 소천하였다.

고 김일남 목사 조사 "아름다운 발자취" (서기행 목사)

어렸을 때부터 김일남 목사 외에도 주로 51인 동지회 목사들에게서 신앙에 영향을 받았다. 김일남 목사(목포제일교회, 51인 동지회)는 영흥교회, 몽탄중앙교회 등 중학교 때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전상섭 목사(예천 출신, 전남 일로교회, 51인 동지회)는 하계와 동계학교에서 가르쳤는데 그때 가르침을 받았다. 박요한 목사(이리중앙교회, 51인 동지회)는 설교 노트를 설교 다음 날 보여주었다. 정규오 목사(광주, 51인 동지회)는 전라도 지역에서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았다. 김준곤 목사(서울, 51인 동지회)는 임종예배를 부탁하였다. 조동진 목사(후암교회, 51인 동지회)는 메이천을 번역하였고 해박하고 선교사역에 헌신하였으며 신앙에 영향을 주었다. 김의환 목사(고려파, 총신대 총장)는 장례예배를 부탁하였다. 서기행 목사는 51인 동지회에 이처럼 깊은 영향을 받고 또한 관련을 맺으며 성장하였다. 이러한 삶의 기회들이 2005년 개혁측과 합동(영입)에 바탕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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