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에 본과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들어갔다. 경북 영천 1205호 건설공병단 군종과(군종하사단)으로 군복무를 했다. 주일 오전 9시에서 10시 예배에 오르간 반주를 했고 목사 부재시에는 설교를 했다. 영천 조교동교회(단포교회)에서 설교했다. 영천 나환자 천막촌에서 오후 2시에서 3시 예배에 설교를 했다. 육군형무소에 오후 5시 30분에 방문하는 것에 동행을 하였는데 장기복역수에게 설교를 했다. 영천 신령제일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군목이 반대를 하였다. 그래서 단장에게 말해서 중앙선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설교를 했다. 자전거를 사주신 분이 계셔서 이 자전거를 타고 일반인 교회, 나환자 교회를 다니면서 섬겼다. 1960년에 군 생활 31개월을 마치고 전역했다
함평군 학교면 사거리에 위치한 학다리중학교와 학다리고등학교를 다녔다. 1551년에 6년제 중학교가 3년 중학교와 3년 고등학교로 제도가 바뀌었다. 예전에는 '학중' 이렇게 불렀다. 학다리는 '학교'의 다른 이름이고 옛날 임금이 함평천을 건널 때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도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한 울타리 안에 있다. 서기행 목사는 '학중'에 전교2등으로 입학한 수재였다. 중학교 2학년 때 6.25 전쟁이 났으며 7월 하순에 이 지역에 북한군이 들어왔다가 9월에 도망쳐 나갔다. 함평 빨치산이 있었으나 엄다면 영흥리 영흥들은 들녘의 작은 동네여서 북한군이 거기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학다리 중학교를 1552년에 졸업하였다. 학다리 고등학교에 시험을 치고 입학하였으며 2등으로 입학했을 만큼 수재였다. 학다리 고등학교는 육상부가 유명하였는데 고2 때 전남 고등학교 선수권에서 100미터에 출전하여 2등을 하였다. 100미터 12초 기록이었다. 1955년 2월에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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