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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행 목사] 동네에서 신앙의 핍박이 심했는데 어머니의 기도로 이겨 나갔다

동생 양순의 기이한 전도로 온가족이 한날 한시에 신앙에 충실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를 거절하니까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이 노하여 몰려와서 지붕에 화로를 던질 정도였다. 오랜 세월 제사와 무당과 점쟁이들을 따라서 살았는데 이것을 거부하니까 그들이 온갖 저주를 다 했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많이 아팠는데 이것을 빌미로 더 몰아세웠다. 동생 양순의 죽음 후 가족이 매일 아침 예배를 드렸다.

어머니는 식사기도를 할 때면 밥이 식을 때까지 기도를 하셨다. 가족 중에 신앙에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몇날 몇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한 사람씩 붙잡고 기도하셨는데 몇일을 머무르며 기도하시고 가시곤 하였다. 동생 양순의 죽음과 서기행 목사의 형들도 4명이 20대, 30대, 40대에 암으로 죽었으나 어머니의 기도로 이겨 나갔다. 어머니의 신앙은 특심하여서 서기행 목사는 은퇴할 때까지 어머니같이 간절한 신앙은 보지 못하였다고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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