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내가 매일 기쁘게 목양 40년을 돌아보며
녹취
1.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 나눠 주십시오)
예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과거에도 여러번 교섭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부족한 것이 많아서 아주 거절을 했었습니다. 오늘은 은퇴를 할 날짜가 2달 26일이 남아서 오늘은 그래도 시청자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리고 그래도 목회를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부족하지 마는 나의 목회 생활의 과거를 더듬어 보면서 시청자 여러분들의 행복과 평안과 발전과 부흥을 비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 (총회장으로 봉사 많이 하시는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예 저는 55년에 신학에 들어갔다가 65년에 목사가 됐는데 지금부터 19년 전에 교단 내에 무슨 세속적인 운동이 지도자들에게 있다해서 그래서 총회에 총대가 되고 그때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총회 부서기로 당선된 후에 지금까지 여러 군데에서 신학교 이사장이나 찬송가 공회 대표회장이나 총회장까지 지내온 생활을 생각할 때 부족하고 어리석은 것으로만 보내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고 늘 겸손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남은 2달 동안 하나님께 맡기고 일을 잘해 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총회 총대로 나온 것은 25년 전입니다. 만 25년 동안 총대는 한번만 특별한 일로 못가고 그 외에는 만 25년을 나왔습니다.
3. (대성교회) 1967년 9월 9일날 제가 대성교회에 부임을 했었습니다. 오늘까지 2005년이니까 횟수로 39년이고 만으로는 38년 됐습니다. 그런데 되돌아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좋은 일은 그 자리에서 예배당을 3번 짓는 일하고 좋은 교단의 지도자들이 우리 장로님 중에 많이 났습니다. 선교사님들을 많이 파송하고 현재도 교회 예산의 적어도 20% 이상은 선교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아프리카나 이런데서 가장 훌륭한 선교사로 우리 교단에서 지목되고 있는 분들이 우리 교회 출신 선교사들입니다. 그리고 외국에 신학 공부하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그런 것을 크게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네 목사가 많이 난 교회입니다. 목사가 아주 많이 났습니다.
4. (목회자로 헌신하게 된 처음 계기) 저는 그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예수를 믿었는데요 어머님이 열심히 믿으시고 그래서 어머님따라 어머님이 아프시니까 새벽기도 부축해서 제가 막내니까 다니다가 교회가도 저는 졸죠 어머님이 울며 기도하시던 기도 소리는 어렴풋이 듣고 있었는데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학생들끼리 조금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발길을 잘못해가지고 실명할 뻔한 학생이 한명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가 학교에 와서 선생님의 책상을 곡갱이로 파고 또 저는 학교를 다닐 수가 없게 되어서 어디 갈데가 없어서 교회가서 울고 있으니까 어머니께서 네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네가 앞으로 멋을 하겠다고 해라 제가 감옥에 가느냐 학교를 그만 두냐 내 평생에 좌절이 될 것 같아서 그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면은 제가 목사는 못하고 주를 위해서 살아보겠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그 이틑날 학교에 가서 보니까 그 학생이 깨끗히 낫고 학교 선생님이 마침 교무주임이 집사님이어서 제가 이렇게 정학도 안맞고 퇴학도 안맞고 그 후로 계속 신학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서원을 했었습니다.
5. (어떻게 믿게 되었나요) 저희 집은 특별한 집입니다. 저희 가정을 잠깐 소개하면은 옛날 분들이 다 그랬지 않았습니까. 아들 6에 딸 3을 낳았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제가 막내고 그리고 막내 여동생이 양순인데 해방 후에 광견에 물려서 죽었습니다. 죽었다가. 특별한 관도 아니고 집에서 만든 널판으로 관으로 널라고 할 때 살아났습니다. 그 애가 일어나서 그 애만 주일학교 다니고 그랬는데 그 애가 천국가서 주님께서 명령해서 왔으니까 전부 교회의 장로님 집사님들 모시고 오라고 해서 죽었다고 살아났으니까 전부 모시고 왔었습니다. 그 때 참석하신 분이 현재 유명한 이원설 박사 아버님 (저 성도교회 장도일 목사 외할아버지입니다) 조응룡 목사 아버지인 조응만 장로(그 때 조응만 집사였는데)가 참석을 하시고 그 때부터 교회를 그 애가 유언을 해서 전체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님이 명령했으니까 예수를 그날부터 믿기 시작해서 동생은 죽고 우리 가정이 개인 개인이 믿는 것이 아니고 전체가 다 교회를 나갔습니다. 저희 집은 한 가정도 무슨 더디 믿고 일찍 믿고 그런 것이 없이 일시에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래서 믿었습니다. 예. 저는 사실은 목회보다도 동생 생각해서 어린이 목사가 되려고 어린이를 위한 목사가 되려고 젊었을 때는 거기에 총 치중을 해서 목회보다는 어린이 교육에 전념을 다하려고 했는데 제가 부족을 깨닫고 다시 목회에 나섰습니다.
6. (부모님들이 결심도 대단했을 것같습니다) 그 당시 저희 집은 해방 막되고니까 일정시대부터 무당, 점치고 한달에 한번골로 비손하고 1년에 두세번은 밤을 새가면서 경문을 읽는 집이었어요. 그리고 여러대에 제사를 지냈어요. 우리 집안에서도 예수를 믿으니까 화로로 지붕위에 불을 지르고, 무당들이, 굿쟁이들이, 점쟁이들이 특히 모함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어머님이 특별이 믿음이 좋으셨어요. 우리 어머님이 신앙생활을 믿는 날부터 새벽기도를 안빠지시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잘해서 저희 가정이 오늘날 제가 목사가 되고 저희 가정 안에 많은 목회자가 있지 않았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어머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금 제가 여기 우리 교인들도 계십니다마는 아직까지 우리 어머님처럼 덮어놓고 믿는 분은 못봤습니다. 가령 저희 형님들 4분이나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분은 28, 한 분은 32, 한 분은 36, 한 분은 42, 그럴 때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 오셔서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저주받은 집이라고. 전도 문이 막힌다고. 그때부터 우리 어머님은 교인들 한테 인사도 않고 예배당에 새벽에 가면 금식하고 주일날 저녁 예배 마칠 때까지 화장실 가는 일 외에는 땅에 엎져서 기도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님은 무식하지마는 무식하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입니다마는 무학이십니다. 그런데 하루에 2번씩 꼭 가정예배를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님이 동생(양순)이 하늘나라에 갔다가 되돌아와서 전도한 모습을 항상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저도 지금 그렇습니다. 지금은 (형제중에) 살아계신 분이 88살 잡수신 장로님 한 분 계시고 그리고 제가 있고 제 누이 동생도 남편이 장로인데 죽었고 지금 권사로 있고 제 누나가 권사님으로 계십니다. 80살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그... 가족식구가 다 믿음이 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러는 교회도 빠지고 주일도 안나오고 그러면 그 집가서 어머님은 그 집서 우리 형수들이 교회를 잘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할 때까지 금식하고 끔쩍도 않고 계셨습니다. 어머님 후손은 다른 교단도 아니고 전부 합동 측 교단에 머물러 있습니다. 금식도 하시고 또 철야도 하시고 또 손자. 어머님으로서는 손자들을 위해서 만날 때 마다 기도하십니다. 특별한 분입니다. 만날 때마다. 열번 만나도 붙잡고 기도하십니다. 저희 어머님은 전국의 시청자들을 위해서도 제가 말씀을 드리는데 저희 아버님이 금요일 날 돌아가셨는데요 주일날 못하니까 월요일날 장례를 하는데 어머님은 새벽기도도 가시고 주일도 지키시고 월요일날 장례하시고. 그리고 우리 4째 형님이 대학교 법대를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셨습니다. 위암으로. 그런데 토요일 날 돌아가셨어요. 8월 15일날 돌아가셨는데 주일 못하니까 월요일 날 하는데 주일 날 아들 시체를 방안에 놔두고 교회를 가셨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목회할 때 그런 신자를 아직 못봤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것을 본 받으려고 늘 생각합니다. 목사인데 내가 목사인데 우리 어머님의 신앙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90% 정도 이상.
7. (대성교회가 처음이셨어요?) 아닙니다. 시골 이라기 보다도 목포 영락교회 호남동 1번지에 있는 교회 상당히 큰 교회 그 당시에도 목포시에서 상당히 큰 교회입니다. 그래도 어머님께서 세차례를 오셨어요. 내가 서원기도를 했는데 너는 서울가서 목회를 하고 지역교회를 위하지 말고 한국교회를 위해서 살아야 된다. 다 잃었지마는 너 하나 남았는데 그렇게 살아라. 그래서 어머님의 부탁을 3번 받고 기도를 했는데 바로 오늘 제가 부임하고 있는 교회도 없고 교인도 없고 그런 교회 예배당도 없고 교인도 새벽기도 하니까 한 사람 나오고 주일 낮에 첫예배을 드렸는데 12사람 나오고 그런 교회를 담임할 때 우리 어머님이 석달만에 오셔서 한달 기도하고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죽기 전에는 이 자리를 옮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큰 교회 청빙을 받았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총회장이 되고 나니까 우리 어머님께서는 기도에 확신이 있었던갑다 나도 모르고 어머님도 모르시는 일이지마는 이 자리를 떠나지 말라 그 자리 그대로 예배당을 3번 지었습니다.
8. (대성교회에서 하신 일) 12사람에서 조금식 불어서 갑자기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병자도 낫고 그러니까 무슨 특별한 사람이 온 줄로 알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이 사람들을 그냥 놔두면 하나님의 사람이 안된다고 그래서 67년에 부임을 해가지고 장로님도 안계시고 나 혼자 당회가 나 혼자 해서 십일조 작정서, 성수주일 작정, 주일헌금 작정 해가지고 최소한의 기준을 서리집사는 주일성수하고 십일조를 내야 된다. 헌금을 서리집사가 걷는데 본인이 십일조를 안내면서 본인이 남의 십일조를 걷으러 다닌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그리고 안내를 하는데 본인이 주일성수를 안하는데 주일예배를 들어가는 사람들을 환영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기초를 아주 적은 데서 출발해서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십일조를 안내거나 주일성수 못하면 서리집사 못합니다. 처음에는 예배당이 없으니까 노천에서 겨울을 보낼 수는 없으니까 빚을 내서 지었어요. 2번째는 교인이 기하급수적으로 3부까지 그 당시에 2부라도 영락교회 밖에 없을 땐데 3부까지 드리다가 예배당을 그 터에다가 지었습니다. 무리하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그 예배당에서 은퇴할라 했었는데 진짜 이 3번째는 34억을 들였는데 1993년에 건축했습니다. 근데 34억이면 그 때도 큽니다. 성도들이 마지막 건축을 했습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건축업자도 위원들이 정하고 헌금도 다 그 분들이 하시고 가장 편하게 제가 했었습니다. (34억이면 지금도 큰 돈입니다-진행자) 그 당시 꽤나 컸었습니다. (2번째 건축 당시 힘든 일) 예 우리 예수님도 그렇게 당하셨는데 교회 건축헌금이 모아지니까 돈독이 드는 교인이 생겨요. 그래서 지금 돌아가셨으니까 이름을 밝힐 수도 없고 내 밑에서 늘 사무장으로 일을 하던 분이 우리 장로님과 나하고 같이 가서 좋으신 장로님하고 같이 가서 맡겼는데 영수증이 가짜예요. 어느 회산데. 영수증이 분명히 맞은데 도장도 맞고 맞은데 본사에 이입이 안되고 본인 도장을 써서 한번 애를 먹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내 평생 가장 큰 고통을 당했어요. 근데 예배당을 짓는 순간인데 하도 내가 우니까 지나가는 다른 교인이 그 소리를 듣고 올라와서 내가 기도하는데 둥둥 두드려요 누구냐고 보니까 모르는 교인이예요. 목사님 그렇게 꼭 돈이 필요하면 제가 드리겠습니다. 하도 우니까요. 우는 소리가 길가에 들렸어요. 그분이 지금 우리교회 권사도 되고 그 남편이 장로도 됐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예배당을 지어줬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일도 지금 생각해보면 크게 사용하시려고 그런 일이 있으셨겠어요-진행자) 크게는 아니고 마지막까지 안쫓겨나고... 2달 반인데 쫓아내겠습니까(웃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아픔이 크셨겠습니다-진행자) 시청자들이 어떻게 들을 지 모르지만 저는 설교할 때도 예수님의 사람은 믿을 수 있어도 사람은 안 믿는다고 그럽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믿어도 사람은 믿을 수가 없더라. 예수를 잘 못 믿는 사람은 믿기 힘들어요. 또 나 자신도 그렇고요. 요세는 은퇴하려니까 우리 장로님들 내가 많이 의지합니다(웃음).
9. (성도님들에 대해서) 현재 제가 소속한 노회는 수도노회입니다. 목사만 360명되는 노회입니다. 목사님들이 앉으면 대성교회같은 장로님들하고 같이 목회 한번 해봤으면 그럽니다. 대성교회같이 말잘듣는 교회에서 목회 한번 해봤으면 하는 것이 우리 노회고. 전국 교회에서도 제가 총회장이니깐 우리 교회 장로님이 전국 장로회 합동측 회장님이 계십니다. 그 장로님을 보고는 다 총회장님이 있는 교회 가서 2년만 목회해 보면 좋겠다. 그런 좋은 교회입니다.
10. (성도님 두분 증언) 대성교회 하태초 장로입니다. 전국 장로회 연합회 회장 맡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계셨나요-진행자) 뒤에 왔습니다. (목사님이 원칙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었었나요) 제가 믿음이 부족했을 때니까 우리 목사님이 헌금을 강요하지 않나. 믿음 없는 사람들이 말을 듣고 우리 교회 왔다가 돌아가지 않나 이런 걱정을 사실 했습니다. 오늘 날 보니까 우리 목사님께서 한평생 참 예수님 다음으로 지금 우리 세상의 목사님들 중에는 가장 훌륭한 목사님이었다. 그렇게 저희 성도들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우리 목사님 신도 들지 못할 정도로 부족하고 죄인이고 참 어리석은 사람이지마는 목사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니까 우리 목사님은 말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실천하는 그런 목회자이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제 당연한 작정을 하셨다. 그렇게 전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고. 또 사실 헌금뿐이 아닙니다. 철야기도도 정회원, 부회원을 다 작정해서 서명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인들은 아주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익숙하게 됐고. 이제 목사님이 말씀을 안하시더라고 2달후에 아주 떠나시더라도 저희들은 말씀 안해도 꼭 그대로 성도들이 하실 걸로 저는 확신합니다. 이것을 우리 목사님께서 성경대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저희 교회에서 오늘 총회장도 나오시고 또 이렇게 성도들이 많은 축복을 받고 우리 교회가 전국 교회에서도 모범된 교회라고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해오신 것같습니다. 이것은 우리 목사님의 그동안 목회에 눈물과 땀과 기도와 헌신과 희생의 제물로 우리 교회가 이렇게 되고 우리 성도들이 큰 은혜 가운데 축복 가운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번째) 우리 목사님은요 어 정말 그 늘 성경 중심으로 우리들에게 말씀 주셨고 또 제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18년동안 목사님을 지켜봤는데 단 한번도 거기에 부족하도록 하신 적이 없어요. 목사님이 몸소 항상 그렇게 실천하셨고 우리 성도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따라갔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목사님이 그렇게 눈물 뿌리시며 기도하시는 모습과 헌신하시는 것은 저희 대성교회는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대성교회는 목사님을 너무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곧 은퇴하시는데 서운한 점은-진행자) 목사님은 다 알고 계세요. 위로해 주세요. 부모님같으시기 때문에 그런 믿음으로 항상 저희들은 목사님을 바라봤기 때문에 어려울 때도 많았죠. 정말 성경중심으로 항상 하시기 때문에 어려웠지 목사님에 대한 서운함은 전혀 없었어요. 그리고 말씀대로 따라 살면 정말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저는 정말 목사님에 대한 그런 것들을 정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원리 원칙에 대해서 힘든 점-진행자) 처음에는 조금 목사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들에 항상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항상 마음에 좀더 잘해야 되는데 그런 마음을 가졌었는데 말씀대로 정말 살다보니까 그런 것들이 정말 저희 삶에 있어서는 목사님이 안계셨다면 저희 가정이 구원의 역사가 없었고 저 또한 목사님이 항상 은퇴 안하시고 저희와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은퇴하시는데 목사님께 바라는점-진행자) 목사님 늘 건강하시고 대성교회 항상 뒤에서 기도해주시고 항상 기도하시지만 정말 건강하게 오래오래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은퇴 미루고 싶은 생각은-진행자) 저는 1935년 10월 24일생입니다. 총회장이 법을 지켜야죠. 그날로 은퇴합니다. (칼날 같으십니다-진행자) 그래야 안되겠습니까(웃음)
11. (되돌아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다시 인간적으로 인간적으로 목회를 해보라고 하면은 하나님 앞에서도 싫다 그렇게 할 수 있는데 가장 늘 요새 감사하는 것은 제가 목회할 수 있는 그 일이 가장 복된 일이고 또 구원사역에 봉사고 또 하나님의 사람들을 길러내는 교사고 또 세계선교를 뒷바침하는 하나의 서포트를 한다는 생각에서 가장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가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시청자들이 알른지 모르겠지만 제가 암으로 앓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심근경색으로 제가 심장이 안좋아서 제가 어려웠는데 지금까지도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좋아졌습니다. 지금은 병원에서도 아주 좋은 말을 해줍니다. 감사합니다.
12. (후배 목사님들을 위해서 한말씀) 제가 가장 목회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요. 나와의 싸움에서 언제나 져요. 내가. 성도들하고 싸워서는 내가 이기는데. 나와의 싸움에서 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금식도 해보고 철야도 하고 지금도 성도들이 계십니다마는 3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에 갑니다.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 한 거의 참석합니다. 물론 제가 인도하고. 마지막에 제가 좀 10여년 동안은 원고를 미리써서 들어올 때 교인들이 받아 가지고 그걸 보고 강의를 듣도록 합니다. 그건 절대 시청자 목사님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아플 때도 써야 되고. 바쁠 때도 써야 되고. 가정이 무슨 병원에 가도 써야 되고. 자식이 아파도 써서 원고를 주고 가야. 내일 아침 새벽기도를 인도하니까. 지금 1, 2, 3권 나오고 4, 5권 이래서 마지막 권만 나오면 신구약을 2번합니다. 근데 나는 그것을 자랑으로 남기고 은퇴합니다. 그것은. (당신께서는 하시고 후배는 하지 말라하시면-진행자) 왜냐하며는 담임목사가 계속 새벽기도를 제가 하니까 부목사님들에게 교육도 안되고 또 교육전도사들에게도 안되고 또 미숙하지마는 부목사님들이나 강도사님들이나 이분들이 하면 그래도 또 들을 말이 있을텐데 저 혼자 하니까 그게 다 후회됩니다. 그래서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3일밤은 다 부교역자들이 합니다마는. 파트별로 다 자기들이 설교하지마는. 그래도 목사가 앉은 자리에서 하면 좀더 연구를 많이 안하겠습니까. (자신의 영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훈련) 제가 총회를 받들고 노회를 받들고 우리 교회를 봉사하는데 가장 무서운 것이 내 마음 속에 있는 명예욕이에요. 그것과 싸우는 데 힘이 들었습니다. 장짜. 제가 총회장이 되었으니까 이런 말을 할수밖에 없지만은. 제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니고 10사람 후보중에서 제가 당선이 되었는데 그것도 돈들여서 된 것도 아니고 제비뽑아서 됐습니다. 그렇게 됐는데. 명예욕과 싸우는 것이 힘들었고 둘째는 목사도 자녀가 아프다든지 공부를 해야 된다든지 이런 것 때문에 물질적인 고통이 내가 참기가 힘들어요 그것도 교회서 주는 것도 많이 주지마는 교회도 다 바쳐야 되는거니까 나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또 서원을 그렇게 했지마는. 그런거 돈과의 싸움에서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교인들에게 다 말했습니다. 은퇴할 때 교회가 준 것 외에 내가 유산이 있으면 날 가짜로 취급해라. 2달 반 남았으니까 조사할 것도 말 것도 없습니다(웃음). (솔직한 말씀하셨어요. 명예와 물질이 어려웠다-진행자) 지금도 어렵습니다.
13. (은퇴 후에 계획) 제가 은퇴를 하면 원래는 은퇴하신 분들을 위로하는 것과 혹은 목회자들의 시야를 넓히는 일을 봉사하고자 했었습니다. 지금 최근에 와서는 첫째는 기도하는 일을 정기적으로 해야 쓰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요. 또 은퇴하고 이곳 저곳 기웃거리지 않으려고 생각합니다. 사라지면 깨끗하게 사라지고 싶습니다. 가정으로 돌아갈랍니다. (가정에 대해서) 시청자 여러분들에게 목사님들에게 교인들에게 부탁은 가정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소리는 첫째 하고 싶고요. 돌보라까지는 못하겠고요. 저는 가정을 늘 잊었어요. 두번째는 목사도 도덕적이어야 된다. 도적적이어야 된다. 이런 생각을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너무 유교적인 것은 아니고 성경적인 도적적을 말합니다. (목사님 위해 어떤 기도해 드리면 좋을까요-진행자) 요한삼서에 보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야 되는데 은퇴해도 영성있고 믿음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해 주고. 내 몸이 건강하지 못해서 교회에 짐이 되거나 그리고 교단장을 지낸 사람이 누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곱게 살아 살아지도록 은혜를 달라고 그렇게 부탁하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1.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 나눠 주십시오)
예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과거에도 여러번 교섭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부족한 것이 많아서 아주 거절을 했었습니다. 오늘은 은퇴를 할 날짜가 2달 26일이 남아서 오늘은 그래도 시청자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리고 그래도 목회를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부족하지 마는 나의 목회 생활의 과거를 더듬어 보면서 시청자 여러분들의 행복과 평안과 발전과 부흥을 비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 (총회장으로 봉사 많이 하시는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예 저는 55년에 신학에 들어갔다가 65년에 목사가 됐는데 지금부터 19년 전에 교단 내에 무슨 세속적인 운동이 지도자들에게 있다해서 그래서 총회에 총대가 되고 그때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총회 부서기로 당선된 후에 지금까지 여러 군데에서 신학교 이사장이나 찬송가 공회 대표회장이나 총회장까지 지내온 생활을 생각할 때 부족하고 어리석은 것으로만 보내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고 늘 겸손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남은 2달 동안 하나님께 맡기고 일을 잘해 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총회 총대로 나온 것은 25년 전입니다. 만 25년 동안 총대는 한번만 특별한 일로 못가고 그 외에는 만 25년을 나왔습니다.
3. (대성교회) 1967년 9월 9일날 제가 대성교회에 부임을 했었습니다. 오늘까지 2005년이니까 횟수로 39년이고 만으로는 38년 됐습니다. 그런데 되돌아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좋은 일은 그 자리에서 예배당을 3번 짓는 일하고 좋은 교단의 지도자들이 우리 장로님 중에 많이 났습니다. 선교사님들을 많이 파송하고 현재도 교회 예산의 적어도 20% 이상은 선교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아프리카나 이런데서 가장 훌륭한 선교사로 우리 교단에서 지목되고 있는 분들이 우리 교회 출신 선교사들입니다. 그리고 외국에 신학 공부하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그런 것을 크게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네 목사가 많이 난 교회입니다. 목사가 아주 많이 났습니다.
4. (목회자로 헌신하게 된 처음 계기) 저는 그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예수를 믿었는데요 어머님이 열심히 믿으시고 그래서 어머님따라 어머님이 아프시니까 새벽기도 부축해서 제가 막내니까 다니다가 교회가도 저는 졸죠 어머님이 울며 기도하시던 기도 소리는 어렴풋이 듣고 있었는데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학생들끼리 조금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발길을 잘못해가지고 실명할 뻔한 학생이 한명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가 학교에 와서 선생님의 책상을 곡갱이로 파고 또 저는 학교를 다닐 수가 없게 되어서 어디 갈데가 없어서 교회가서 울고 있으니까 어머니께서 네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네가 앞으로 멋을 하겠다고 해라 제가 감옥에 가느냐 학교를 그만 두냐 내 평생에 좌절이 될 것 같아서 그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면은 제가 목사는 못하고 주를 위해서 살아보겠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그 이틑날 학교에 가서 보니까 그 학생이 깨끗히 낫고 학교 선생님이 마침 교무주임이 집사님이어서 제가 이렇게 정학도 안맞고 퇴학도 안맞고 그 후로 계속 신학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서원을 했었습니다.
5. (어떻게 믿게 되었나요) 저희 집은 특별한 집입니다. 저희 가정을 잠깐 소개하면은 옛날 분들이 다 그랬지 않았습니까. 아들 6에 딸 3을 낳았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제가 막내고 그리고 막내 여동생이 양순인데 해방 후에 광견에 물려서 죽었습니다. 죽었다가. 특별한 관도 아니고 집에서 만든 널판으로 관으로 널라고 할 때 살아났습니다. 그 애가 일어나서 그 애만 주일학교 다니고 그랬는데 그 애가 천국가서 주님께서 명령해서 왔으니까 전부 교회의 장로님 집사님들 모시고 오라고 해서 죽었다고 살아났으니까 전부 모시고 왔었습니다. 그 때 참석하신 분이 현재 유명한 이원설 박사 아버님 (저 성도교회 장도일 목사 외할아버지입니다) 조응룡 목사 아버지인 조응만 장로(그 때 조응만 집사였는데)가 참석을 하시고 그 때부터 교회를 그 애가 유언을 해서 전체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님이 명령했으니까 예수를 그날부터 믿기 시작해서 동생은 죽고 우리 가정이 개인 개인이 믿는 것이 아니고 전체가 다 교회를 나갔습니다. 저희 집은 한 가정도 무슨 더디 믿고 일찍 믿고 그런 것이 없이 일시에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래서 믿었습니다. 예. 저는 사실은 목회보다도 동생 생각해서 어린이 목사가 되려고 어린이를 위한 목사가 되려고 젊었을 때는 거기에 총 치중을 해서 목회보다는 어린이 교육에 전념을 다하려고 했는데 제가 부족을 깨닫고 다시 목회에 나섰습니다.
6. (부모님들이 결심도 대단했을 것같습니다) 그 당시 저희 집은 해방 막되고니까 일정시대부터 무당, 점치고 한달에 한번골로 비손하고 1년에 두세번은 밤을 새가면서 경문을 읽는 집이었어요. 그리고 여러대에 제사를 지냈어요. 우리 집안에서도 예수를 믿으니까 화로로 지붕위에 불을 지르고, 무당들이, 굿쟁이들이, 점쟁이들이 특히 모함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어머님이 특별이 믿음이 좋으셨어요. 우리 어머님이 신앙생활을 믿는 날부터 새벽기도를 안빠지시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잘해서 저희 가정이 오늘날 제가 목사가 되고 저희 가정 안에 많은 목회자가 있지 않았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어머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금 제가 여기 우리 교인들도 계십니다마는 아직까지 우리 어머님처럼 덮어놓고 믿는 분은 못봤습니다. 가령 저희 형님들 4분이나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분은 28, 한 분은 32, 한 분은 36, 한 분은 42, 그럴 때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 오셔서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저주받은 집이라고. 전도 문이 막힌다고. 그때부터 우리 어머님은 교인들 한테 인사도 않고 예배당에 새벽에 가면 금식하고 주일날 저녁 예배 마칠 때까지 화장실 가는 일 외에는 땅에 엎져서 기도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님은 무식하지마는 무식하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입니다마는 무학이십니다. 그런데 하루에 2번씩 꼭 가정예배를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님이 동생(양순)이 하늘나라에 갔다가 되돌아와서 전도한 모습을 항상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저도 지금 그렇습니다. 지금은 (형제중에) 살아계신 분이 88살 잡수신 장로님 한 분 계시고 그리고 제가 있고 제 누이 동생도 남편이 장로인데 죽었고 지금 권사로 있고 제 누나가 권사님으로 계십니다. 80살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그... 가족식구가 다 믿음이 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러는 교회도 빠지고 주일도 안나오고 그러면 그 집가서 어머님은 그 집서 우리 형수들이 교회를 잘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할 때까지 금식하고 끔쩍도 않고 계셨습니다. 어머님 후손은 다른 교단도 아니고 전부 합동 측 교단에 머물러 있습니다. 금식도 하시고 또 철야도 하시고 또 손자. 어머님으로서는 손자들을 위해서 만날 때 마다 기도하십니다. 특별한 분입니다. 만날 때마다. 열번 만나도 붙잡고 기도하십니다. 저희 어머님은 전국의 시청자들을 위해서도 제가 말씀을 드리는데 저희 아버님이 금요일 날 돌아가셨는데요 주일날 못하니까 월요일날 장례를 하는데 어머님은 새벽기도도 가시고 주일도 지키시고 월요일날 장례하시고. 그리고 우리 4째 형님이 대학교 법대를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셨습니다. 위암으로. 그런데 토요일 날 돌아가셨어요. 8월 15일날 돌아가셨는데 주일 못하니까 월요일 날 하는데 주일 날 아들 시체를 방안에 놔두고 교회를 가셨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목회할 때 그런 신자를 아직 못봤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것을 본 받으려고 늘 생각합니다. 목사인데 내가 목사인데 우리 어머님의 신앙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90% 정도 이상.
7. (대성교회가 처음이셨어요?) 아닙니다. 시골 이라기 보다도 목포 영락교회 호남동 1번지에 있는 교회 상당히 큰 교회 그 당시에도 목포시에서 상당히 큰 교회입니다. 그래도 어머님께서 세차례를 오셨어요. 내가 서원기도를 했는데 너는 서울가서 목회를 하고 지역교회를 위하지 말고 한국교회를 위해서 살아야 된다. 다 잃었지마는 너 하나 남았는데 그렇게 살아라. 그래서 어머님의 부탁을 3번 받고 기도를 했는데 바로 오늘 제가 부임하고 있는 교회도 없고 교인도 없고 그런 교회 예배당도 없고 교인도 새벽기도 하니까 한 사람 나오고 주일 낮에 첫예배을 드렸는데 12사람 나오고 그런 교회를 담임할 때 우리 어머님이 석달만에 오셔서 한달 기도하고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죽기 전에는 이 자리를 옮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큰 교회 청빙을 받았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총회장이 되고 나니까 우리 어머님께서는 기도에 확신이 있었던갑다 나도 모르고 어머님도 모르시는 일이지마는 이 자리를 떠나지 말라 그 자리 그대로 예배당을 3번 지었습니다.
8. (대성교회에서 하신 일) 12사람에서 조금식 불어서 갑자기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병자도 낫고 그러니까 무슨 특별한 사람이 온 줄로 알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이 사람들을 그냥 놔두면 하나님의 사람이 안된다고 그래서 67년에 부임을 해가지고 장로님도 안계시고 나 혼자 당회가 나 혼자 해서 십일조 작정서, 성수주일 작정, 주일헌금 작정 해가지고 최소한의 기준을 서리집사는 주일성수하고 십일조를 내야 된다. 헌금을 서리집사가 걷는데 본인이 십일조를 안내면서 본인이 남의 십일조를 걷으러 다닌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그리고 안내를 하는데 본인이 주일성수를 안하는데 주일예배를 들어가는 사람들을 환영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기초를 아주 적은 데서 출발해서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십일조를 안내거나 주일성수 못하면 서리집사 못합니다. 처음에는 예배당이 없으니까 노천에서 겨울을 보낼 수는 없으니까 빚을 내서 지었어요. 2번째는 교인이 기하급수적으로 3부까지 그 당시에 2부라도 영락교회 밖에 없을 땐데 3부까지 드리다가 예배당을 그 터에다가 지었습니다. 무리하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그 예배당에서 은퇴할라 했었는데 진짜 이 3번째는 34억을 들였는데 1993년에 건축했습니다. 근데 34억이면 그 때도 큽니다. 성도들이 마지막 건축을 했습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건축업자도 위원들이 정하고 헌금도 다 그 분들이 하시고 가장 편하게 제가 했었습니다. (34억이면 지금도 큰 돈입니다-진행자) 그 당시 꽤나 컸었습니다. (2번째 건축 당시 힘든 일) 예 우리 예수님도 그렇게 당하셨는데 교회 건축헌금이 모아지니까 돈독이 드는 교인이 생겨요. 그래서 지금 돌아가셨으니까 이름을 밝힐 수도 없고 내 밑에서 늘 사무장으로 일을 하던 분이 우리 장로님과 나하고 같이 가서 좋으신 장로님하고 같이 가서 맡겼는데 영수증이 가짜예요. 어느 회산데. 영수증이 분명히 맞은데 도장도 맞고 맞은데 본사에 이입이 안되고 본인 도장을 써서 한번 애를 먹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내 평생 가장 큰 고통을 당했어요. 근데 예배당을 짓는 순간인데 하도 내가 우니까 지나가는 다른 교인이 그 소리를 듣고 올라와서 내가 기도하는데 둥둥 두드려요 누구냐고 보니까 모르는 교인이예요. 목사님 그렇게 꼭 돈이 필요하면 제가 드리겠습니다. 하도 우니까요. 우는 소리가 길가에 들렸어요. 그분이 지금 우리교회 권사도 되고 그 남편이 장로도 됐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예배당을 지어줬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일도 지금 생각해보면 크게 사용하시려고 그런 일이 있으셨겠어요-진행자) 크게는 아니고 마지막까지 안쫓겨나고... 2달 반인데 쫓아내겠습니까(웃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아픔이 크셨겠습니다-진행자) 시청자들이 어떻게 들을 지 모르지만 저는 설교할 때도 예수님의 사람은 믿을 수 있어도 사람은 안 믿는다고 그럽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믿어도 사람은 믿을 수가 없더라. 예수를 잘 못 믿는 사람은 믿기 힘들어요. 또 나 자신도 그렇고요. 요세는 은퇴하려니까 우리 장로님들 내가 많이 의지합니다(웃음).
9. (성도님들에 대해서) 현재 제가 소속한 노회는 수도노회입니다. 목사만 360명되는 노회입니다. 목사님들이 앉으면 대성교회같은 장로님들하고 같이 목회 한번 해봤으면 그럽니다. 대성교회같이 말잘듣는 교회에서 목회 한번 해봤으면 하는 것이 우리 노회고. 전국 교회에서도 제가 총회장이니깐 우리 교회 장로님이 전국 장로회 합동측 회장님이 계십니다. 그 장로님을 보고는 다 총회장님이 있는 교회 가서 2년만 목회해 보면 좋겠다. 그런 좋은 교회입니다.
10. (성도님 두분 증언) 대성교회 하태초 장로입니다. 전국 장로회 연합회 회장 맡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계셨나요-진행자) 뒤에 왔습니다. (목사님이 원칙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었었나요) 제가 믿음이 부족했을 때니까 우리 목사님이 헌금을 강요하지 않나. 믿음 없는 사람들이 말을 듣고 우리 교회 왔다가 돌아가지 않나 이런 걱정을 사실 했습니다. 오늘 날 보니까 우리 목사님께서 한평생 참 예수님 다음으로 지금 우리 세상의 목사님들 중에는 가장 훌륭한 목사님이었다. 그렇게 저희 성도들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우리 목사님 신도 들지 못할 정도로 부족하고 죄인이고 참 어리석은 사람이지마는 목사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니까 우리 목사님은 말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실천하는 그런 목회자이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제 당연한 작정을 하셨다. 그렇게 전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고. 또 사실 헌금뿐이 아닙니다. 철야기도도 정회원, 부회원을 다 작정해서 서명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인들은 아주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익숙하게 됐고. 이제 목사님이 말씀을 안하시더라고 2달후에 아주 떠나시더라도 저희들은 말씀 안해도 꼭 그대로 성도들이 하실 걸로 저는 확신합니다. 이것을 우리 목사님께서 성경대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저희 교회에서 오늘 총회장도 나오시고 또 이렇게 성도들이 많은 축복을 받고 우리 교회가 전국 교회에서도 모범된 교회라고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해오신 것같습니다. 이것은 우리 목사님의 그동안 목회에 눈물과 땀과 기도와 헌신과 희생의 제물로 우리 교회가 이렇게 되고 우리 성도들이 큰 은혜 가운데 축복 가운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번째) 우리 목사님은요 어 정말 그 늘 성경 중심으로 우리들에게 말씀 주셨고 또 제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18년동안 목사님을 지켜봤는데 단 한번도 거기에 부족하도록 하신 적이 없어요. 목사님이 몸소 항상 그렇게 실천하셨고 우리 성도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따라갔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목사님이 그렇게 눈물 뿌리시며 기도하시는 모습과 헌신하시는 것은 저희 대성교회는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대성교회는 목사님을 너무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곧 은퇴하시는데 서운한 점은-진행자) 목사님은 다 알고 계세요. 위로해 주세요. 부모님같으시기 때문에 그런 믿음으로 항상 저희들은 목사님을 바라봤기 때문에 어려울 때도 많았죠. 정말 성경중심으로 항상 하시기 때문에 어려웠지 목사님에 대한 서운함은 전혀 없었어요. 그리고 말씀대로 따라 살면 정말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저는 정말 목사님에 대한 그런 것들을 정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원리 원칙에 대해서 힘든 점-진행자) 처음에는 조금 목사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들에 항상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항상 마음에 좀더 잘해야 되는데 그런 마음을 가졌었는데 말씀대로 정말 살다보니까 그런 것들이 정말 저희 삶에 있어서는 목사님이 안계셨다면 저희 가정이 구원의 역사가 없었고 저 또한 목사님이 항상 은퇴 안하시고 저희와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은퇴하시는데 목사님께 바라는점-진행자) 목사님 늘 건강하시고 대성교회 항상 뒤에서 기도해주시고 항상 기도하시지만 정말 건강하게 오래오래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은퇴 미루고 싶은 생각은-진행자) 저는 1935년 10월 24일생입니다. 총회장이 법을 지켜야죠. 그날로 은퇴합니다. (칼날 같으십니다-진행자) 그래야 안되겠습니까(웃음)
11. (되돌아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다시 인간적으로 인간적으로 목회를 해보라고 하면은 하나님 앞에서도 싫다 그렇게 할 수 있는데 가장 늘 요새 감사하는 것은 제가 목회할 수 있는 그 일이 가장 복된 일이고 또 구원사역에 봉사고 또 하나님의 사람들을 길러내는 교사고 또 세계선교를 뒷바침하는 하나의 서포트를 한다는 생각에서 가장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가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시청자들이 알른지 모르겠지만 제가 암으로 앓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심근경색으로 제가 심장이 안좋아서 제가 어려웠는데 지금까지도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좋아졌습니다. 지금은 병원에서도 아주 좋은 말을 해줍니다. 감사합니다.
12. (후배 목사님들을 위해서 한말씀) 제가 가장 목회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요. 나와의 싸움에서 언제나 져요. 내가. 성도들하고 싸워서는 내가 이기는데. 나와의 싸움에서 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금식도 해보고 철야도 하고 지금도 성도들이 계십니다마는 3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에 갑니다.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 한 거의 참석합니다. 물론 제가 인도하고. 마지막에 제가 좀 10여년 동안은 원고를 미리써서 들어올 때 교인들이 받아 가지고 그걸 보고 강의를 듣도록 합니다. 그건 절대 시청자 목사님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아플 때도 써야 되고. 바쁠 때도 써야 되고. 가정이 무슨 병원에 가도 써야 되고. 자식이 아파도 써서 원고를 주고 가야. 내일 아침 새벽기도를 인도하니까. 지금 1, 2, 3권 나오고 4, 5권 이래서 마지막 권만 나오면 신구약을 2번합니다. 근데 나는 그것을 자랑으로 남기고 은퇴합니다. 그것은. (당신께서는 하시고 후배는 하지 말라하시면-진행자) 왜냐하며는 담임목사가 계속 새벽기도를 제가 하니까 부목사님들에게 교육도 안되고 또 교육전도사들에게도 안되고 또 미숙하지마는 부목사님들이나 강도사님들이나 이분들이 하면 그래도 또 들을 말이 있을텐데 저 혼자 하니까 그게 다 후회됩니다. 그래서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3일밤은 다 부교역자들이 합니다마는. 파트별로 다 자기들이 설교하지마는. 그래도 목사가 앉은 자리에서 하면 좀더 연구를 많이 안하겠습니까. (자신의 영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훈련) 제가 총회를 받들고 노회를 받들고 우리 교회를 봉사하는데 가장 무서운 것이 내 마음 속에 있는 명예욕이에요. 그것과 싸우는 데 힘이 들었습니다. 장짜. 제가 총회장이 되었으니까 이런 말을 할수밖에 없지만은. 제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니고 10사람 후보중에서 제가 당선이 되었는데 그것도 돈들여서 된 것도 아니고 제비뽑아서 됐습니다. 그렇게 됐는데. 명예욕과 싸우는 것이 힘들었고 둘째는 목사도 자녀가 아프다든지 공부를 해야 된다든지 이런 것 때문에 물질적인 고통이 내가 참기가 힘들어요 그것도 교회서 주는 것도 많이 주지마는 교회도 다 바쳐야 되는거니까 나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또 서원을 그렇게 했지마는. 그런거 돈과의 싸움에서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교인들에게 다 말했습니다. 은퇴할 때 교회가 준 것 외에 내가 유산이 있으면 날 가짜로 취급해라. 2달 반 남았으니까 조사할 것도 말 것도 없습니다(웃음). (솔직한 말씀하셨어요. 명예와 물질이 어려웠다-진행자) 지금도 어렵습니다.
13. (은퇴 후에 계획) 제가 은퇴를 하면 원래는 은퇴하신 분들을 위로하는 것과 혹은 목회자들의 시야를 넓히는 일을 봉사하고자 했었습니다. 지금 최근에 와서는 첫째는 기도하는 일을 정기적으로 해야 쓰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요. 또 은퇴하고 이곳 저곳 기웃거리지 않으려고 생각합니다. 사라지면 깨끗하게 사라지고 싶습니다. 가정으로 돌아갈랍니다. (가정에 대해서) 시청자 여러분들에게 목사님들에게 교인들에게 부탁은 가정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소리는 첫째 하고 싶고요. 돌보라까지는 못하겠고요. 저는 가정을 늘 잊었어요. 두번째는 목사도 도덕적이어야 된다. 도적적이어야 된다. 이런 생각을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너무 유교적인 것은 아니고 성경적인 도적적을 말합니다. (목사님 위해 어떤 기도해 드리면 좋을까요-진행자) 요한삼서에 보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야 되는데 은퇴해도 영성있고 믿음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해 주고. 내 몸이 건강하지 못해서 교회에 짐이 되거나 그리고 교단장을 지낸 사람이 누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곱게 살아 살아지도록 은혜를 달라고 그렇게 부탁하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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