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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행 목사] 전남 함평군 엄다면 영흥리 영천들 출생

1935년 10월 24일 전남 함평군 엄다면 영흥리 영천들에서 출생하였다(호적신고 기준). 실제출생은 1934년 8월 25일(음) 혹 24일 출생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영천에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영천들"에도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때 광복을 맞았다. 일제 강점기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말에 능통하였다. 초등학교는 집에서 4키로미터 떨어진 엄다면에 있는 엄다 초등학교다.

처음 교회를 다닌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다. 먼저 어머니와 양순(여동생)이 교회를 다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동생 양순이 광견에게 물려서 광견병으로 사경에 이르렀다. 죽었다고 생각하여 집 마당에서 관에 넣었다. 관이라고 해도 나무관이 아니라 간단하게 만든 관이었다.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한 양순이가 다시 살았다. 그리고 천국에 다녀왔다면서 할 말이 있다고 하였다. 예수님에 대해서 전할 때 반말로 하며 오늘 저녁에 전도하겠다고 하였다. 이 때 영흥교회에서 이신영 장로와 여러분들을 모셔서 듣게 되었다. 이신영 장로는 북에서 피난 온 전도사로서 이후에 목사가 되었다. 이신영 장로는 이원설 박사의 아버지다. 동생 양순의 기이한 전도로 양순 위로 8남매(6남 2녀)가 한날 한시에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누가 먼저 누가 나중 할 것 없이 온 형제가 믿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동생 양순은 이날 저녁 전도 후에 하늘나라에 갔다. 서기행 목사는 목사가 된 후에 동생 양순을 잊지 못하여 어린이 목회에 헌신하고자 하였으나 주신 은사가 다른 것을 깨닫고 일반적인 목회를 하게 된다.

집에서 600미터 정도 떨어진 영흥교회에 어머님이 새벽기도를 다니셨는데 어머님이 몸이 아프셨기 때문에 어머님을 돕기 위해서 새벽기도를 동행하였다. 사람들이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꺼리던 철길을 걸어서 교회에 다녔다.

영흥교회는 미국 남장로교선교부와 녹스(한국명 노라복), 니스벳(한국명 니스벳), 머피(한국명 민도마) 선교사 등의 전도사역을 통해 1909년 3월 15일 함평군 엄다면 신촌리(현 영흥리)에 설립됐다.

영흥교회


영흥교회와 이원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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