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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17의 게시물 표시

[서기행 목사] 2009년 12월 2일 합동 WCC대책위원회 첫 회의가 열렸다

2009년 9월 1일 WCC는 2013년 한국 부산에서 WCC 회의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합동은 WCC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2009년 12월 2일 첫 회의를 열었다. 위원장에 서기행 목사를 선임하였다. 2010년 총회(95회)에서 WCC대책위원회 보고 WCC대책위원장 서기행 씨의 보고(보고서p.157-159)는 받고,  1. 현재 WCC대책위원을 2013년까지 연장청원,  2. 교단결의문 채택 청원,  3. 확대조직 청원은 허락하고, 재정청원은 재정부로 보내기로 하다. 보수교단들 연합해 WCC 총회 반대해야 (기독일보)

[서기행 목사] 1980년 합동보수(개혁 측)과 합동이 분리할 때 합동 편에 섰다

1980년 합동보수(개혁 측)과 합동이 분리할 때 대성교회는 개혁 측과 관련이 된 사람들이 많아서 개혁 측으로 오라는 요청이 컸으나 거절하고 서기행 목사는 합동 측에 섰다. 결국 대성교회가 분리되었다. 대성교회 장로 8인이 개혁 측 임원이 되거나 개혁 측에 소속되어서 교회에서 나가게 되었다. 서기행 목사에게 신앙에 영향을 주었던 대부분의 목사들이 특히 김일남 목사가 개혁 측 총회장이 되었다.

[서기행 목사] 1967년 9월 10일에 서울 북부교회(지금 대성교회) 담임이 되었다(2005년 원로목사)

1967년 9월 10일에 서울 북부교회(서울 이태원동)에 담임이 되었다. 당시 12명의 성도가 있었다. 곧바로 교회 이름을 대성교회로 바꾸었다. 어머니가 상경해서 교인들을 한사람씩 붙들고 기도를 하고 곧 내려갔다. 한 자리에서 목회를 하라는 깊은 각오가 있었다. 한 자리에서 교회 건축을 3번하였다. 2005년 10월 24일 정년으로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대성교회

[서기행 목사] 1966년 목포 영락교회를 담임했다

1966년에 목포 영락교회를 담임했다. 성도는 150명이었다. 교회에 신학교가 있었다. 성경학교 학생이 70명이었는데 졸업생 중에 윤익세 목사가 있다. 이 교회로 가는데 있어서 어머니가 한 달 반 동안 안 보내주는 일이 있었다.

[서기행 목사] 1964년 목포 동문교회를 담임했다

1964년 목포 동문교회를 담임했다. 전임은 백준걸 목사였는데 요한계시록을 앞뒤로 다 외우는 분이었다.

[서기행 목사] 1962년 본과3학년 전도사 신분으로 김제 송지동교회를 담임했다

1962년 김제 송지동교회를 담임했다. 전임자들은 모두 목사였는데 본과3학년 전도사 신분으로 담임을 하게 되었다. 송지동교회는 김제노회에서 네번째로 큰 교회로 150명 성도가 있었다. 이때 십일조를 강조했는데 십일조를 불이행시에는 권징을 한다고 천명하였다. 십일조 창고에 쌀 6가마니가 62가마니로 늘어났다. 이에 대해 교인들이 십일조를 강요한다며 서기행 목사를 노회에 고발을 할 것이라고까지 발언하였다. 추수감사주일에 부흥과 이적이 일어났다. 당시 서울에도 300면 모이는 교회가 10교회도 안되었다. 김제 송지동교회

[서기행 목사] 1960년 12월 13일 결혼했다

서기행 목사는 본과 2학년 복학 후 전도사 시절에 1960년 12월 13일 정영숙 여사와 결혼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2남은 각각 목사(서성용 목사, 미국)와 사업을 하고 있다. 1녀(서성희 사모)는 사모가 되었다(사위 문병호 목사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정영숙 사모는 2004년 4월 16일 향년 67세로 소천했다. 서기행 목사 사모 소천

[서기행 목사] 군대 기간(1958년~1960년, 31개월) 여러 교회를 다니며 사역했다

1958년에 본과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들어갔다. 경북 영천 1205호 건설공병단 군종과(군종하사단)으로 군복무를 했다. 주일 오전 9시에서 10시 예배에 오르간 반주를 했고 목사 부재시에는 설교를 했다. 영천 조교동교회(단포교회)에서 설교했다. 영천 나환자 천막촌에서 오후 2시에서 3시 예배에 설교를 했다. 육군형무소에 오후 5시 30분에 방문하는 것에 동행을 하였는데 장기복역수에게 설교를 했다. 영천 신령제일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군목이 반대를 하였다. 그래서 단장에게 말해서 중앙선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설교를 했다. 자전거를 사주신 분이 계셔서 이 자전거를 타고 일반인 교회, 나환자 교회를 다니면서 섬겼다. 1960년에 군 생활 31개월을 마치고 전역했다

[서기행 목사] 신학교 기간(1955년~1962년) 주일학교 사역을 했다(마포동막교회, 금성교회)

신학교 기간에는 박형룡 박사가 학장으로 있었다. 여름과 겨울에 하계, 동계 성경학교 4주간을 어김없이 주일학교 강사로 다녔다. 무안, 함편 등 시찰에 다녔다. 가는 곳마다 가득 찼다. 예과 때는 마포동막교회(마포구 대흥동, 현 통합측)에서 성가대와 반사로 섬겼다. 51인 동지회였던 김덕수 목사가 고등부 교사로 설교를 하도록 하였다. 사례는 약정이 없이 섬겼다. 마포동막교회 본과 때는 금성교회(중구 신당동, 현 통합측)에서 전도사로 주일학교 전체를 섬겼다. 사례는 약정으로 섬겼다. 금성교회

[서기행 목사] 1957년 총신대학교 본과에 입학하였다

1957년 4월에 본과에 입학하였다. 1958년 1학년 마치고 군대에 들어갔다가 1960년 제대 후 본과 2학년에 복학하였다. 당시 용산에 교사가 있었다. 본과 3학년 때 박형룡 박사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10명 거짓 목사보다 5명 진실한 목사가 낫다." 1962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당시 본과는 16명이 졸업을 하였다. 본과 졸업생 중에 이진태, 임택권, 신세원, 신홍식, 김창대가 있다.

[서기행 목사] 1555년 목사후보생 고시(목포노회)를 보고 총회 신학교(총신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고3때 서리집사 1년을 하고 목포노회에서 목사후보생 고시를 보고 1555년 4월에 총회 신학교(총신대학교) 예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남산에 교사가 있었으며 예과 2년이었다. 예과를 졸업하면 모두 본과는 무시험으로 입학하였다. 총신대학교는 아직 인가가 없었으나 갑종학교였기 때문에 군대 연기가 가능하였다.

[서기행 목사] 1954년 고3때 두 군데 부흥회를 다녔다

학다리고등학교를 다니던 중에 한번은 생각하지 못했던 사고가 터졌다. 친구와 다투다가 발을 질렀는데 그만 상대방 친구가 실명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래의 꿈은 커녕 퇴학에 감옥까지 가야할 수 있다는 위기가 찾아왔다. 그래서 무작정 교회에 가서 엎드려 기도하였다. 그때 이 위기에서 건져주시면 '주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기도하게 되었다. 물론 목회를 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상대방 친구는 회복이 되었고 신앙이 깊으신 학교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1554년 고3 때 몽탄중앙교회가 설립되었고 서리집사가 되었다. 두 군데 부흥회를 다녔다. 천로역정을 읽고 설교했다. 약곡교회에서 오후에 주일학교와 저녁 설교를 했다. 7, 8명의 여자 성도들이 모였다. 지금 신현교회 양성수 장로가 당시 주일학교 학생이었다. 몽탄중앙교회는 당시 40명 가까이 모였은데 두 전도사가 돌보았다.

[서기행 목사] 동네에서 신앙의 핍박이 심했는데 어머니의 기도로 이겨 나갔다

동생 양순의 기이한 전도로 온가족이 한날 한시에 신앙에 충실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를 거절하니까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이 노하여 몰려와서 지붕에 화로를 던질 정도였다. 오랜 세월 제사와 무당과 점쟁이들을 따라서 살았는데 이것을 거부하니까 그들이 온갖 저주를 다 했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많이 아팠는데 이것을 빌미로 더 몰아세웠다. 동생 양순의 죽음 후 가족이 매일 아침 예배를 드렸다. 어머니는 식사기도를 할 때면 밥이 식을 때까지 기도를 하셨다. 가족 중에 신앙에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몇날 몇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한 사람씩 붙잡고 기도하셨는데 몇일을 머무르며 기도하시고 가시곤 하였다. 동생 양순의 죽음과 서기행 목사의 형들도 4명이 20대, 30대, 40대에 암으로 죽었으나 어머니의 기도로 이겨 나갔다. 어머니의 신앙은 특심하여서 서기행 목사는 은퇴할 때까지 어머니같이 간절한 신앙은 보지 못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서기행 목사] 김일남 목사에게서 중학교 때부터 신앙에 영향을 받았다

서기행 목사는 중학교(학다리 중학교 1949~1552) 때부터 김일남(1551년 3월 목사 안수, 목포노회)에게서 신앙에 영향을 받았다. 서기행 목사의 어머니가 김일남 전도사를 집에 모시고 아버지 방에 주무시게 하였다. 그 당시 김일남 전도사는 51인 동지회가 펴낸 부수신학 잡지인 [불기둥]을 주었다. 불기둥은 1947년에 12월 9일에 창간한 기독교 신문이며 제4호부터 잡지로 발간되었고 1550년 폐간되었다. 서기행 목사는 이를 통하여 중학교 때부터 신신학이 무엇인지 알고 경계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규오, 엄두섭, 박요한, 김일남의 신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김일남 목사는 엄다교회를 개척했으며 영흥교회 등을 섬기고 1967년 2월 28일부터 목포제일교회를 시무하였다. 1979년 9월 교단이 분리될 때(64회) 합동보수 교단(개혁 측이라고 함)의 총회장이 되었다. 2005년 90회 총회에서 합동과 개혁이 합동(영입)할 때 개혁 측 회원 맨 앞장을 서서 총회에 입장하였다. 2008년에 향년 86세로 소천하였다. 고 김일남 목사 조사 "아름다운 발자취" (서기행 목사) 어렸을 때부터 김일남 목사 외에도 주로 51인 동지회 목사들에게서 신앙에 영향을 받았다. 김일남 목사(목포제일교회, 51인 동지회)는 영흥교회, 몽탄중앙교회 등 중학교 때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전상섭 목사(예천 출신, 전남 일로교회, 51인 동지회)는 하계와 동계학교에서 가르쳤는데 그때 가르침을 받았다. 박요한 목사(이리중앙교회, 51인 동지회)는 설교 노트를 설교 다음 날 보여주었다. 정규오 목사(광주, 51인 동지회)는 전라도 지역에서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았다. 김준곤 목사(서울, 51인 동지회)는 임종예배를 부탁하였다. 조동진 목사(후암교회, 51인 동지회)는 메이천을 번역하였고 해박하고 선교사역에 헌신하였으며 신앙에 영향을 주었다. 김의환 목사(고려파, 총신대 총장)는 장례예배를 부탁하였다. 서기행 목사는 51인 동지회에 이처럼...

[서기행 목사] 학다리중학교(1552년 졸)와 학다리고등학교(1555년 졸)를 다녔다

함평군 학교면 사거리에 위치한 학다리중학교와 학다리고등학교를 다녔다. 1551년에 6년제 중학교가 3년 중학교와 3년 고등학교로 제도가 바뀌었다. 예전에는 '학중' 이렇게 불렀다. 학다리는 '학교'의 다른 이름이고 옛날 임금이 함평천을 건널 때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도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한 울타리 안에 있다. 서기행 목사는 '학중'에 전교2등으로 입학한 수재였다. 중학교 2학년 때 6.25 전쟁이 났으며 7월 하순에 이 지역에 북한군이 들어왔다가 9월에 도망쳐 나갔다. 함평 빨치산이 있었으나 엄다면 영흥리 영흥들은 들녘의 작은 동네여서 북한군이 거기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학다리 중학교를 1552년에 졸업하였다. 학다리 고등학교에 시험을 치고 입학하였으며 2등으로 입학했을 만큼 수재였다. 학다리 고등학교는 육상부가 유명하였는데 고2 때 전남 고등학교 선수권에서 100미터에 출전하여 2등을 하였다. 100미터 12초 기록이었다. 1955년 2월에 졸업하였다.

[서기행 목사] 1554년 6월 6일 몽탄중앙교회가 개척(설립)되고 서리집사가 되었다

6.25 전쟁 후에 다니던 몽탄역전교회(몽탄면 사천리, 기장측)에서 축자영감성를 거부하였다. 이것으로 인해 7가족이 나와서 몽탄중앙교회를 개척하였다. 남집사 2명과 여집사 4명이었다. 1554년 6월 6일에 설립하였으며 설립할 때 서기행 목사는 서리집사가 되었다. 몽탄역전교회에서 개척하면서 구산리로 나갔다가 현재는 다시 돌아와서 몽탄면 사천리에 위치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은 1947년에 4월 18일 대구 33차 총회에서 조선신학교의 김재준에 대한 진정서가 제출되었고 결국 1953년에 두 교단이 분리하였다. 김재준의 신학은 신신학으로 불려졌고 대표적으로 축자영감성을 거부하였다. 1954년에 약곡교회(노경수 목사), 대치교회, 사창교회, 몽탄중앙교회가 합동에 속하게 되었다. 몽탄중앙교회

[서기행 목사] 6.25 전쟁 후에 몽탄역전교회를 다녔다

서기행 목사는 6.25 전쟁 후에 몽탄역전교회를 다녔다. 몽탄역전교회는 몽탄면 사천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은 한샘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몽탄역전교회(한샘교회)

[서기행 목사] CBS 내가 매일 기쁘게 목양 40년을 돌아보며

CBS 내가 매일 기쁘게 목양 40년을 돌아보며 녹취 1.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 나눠 주십시오) 예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과거에도 여러번 교섭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부족한 것이 많아서 아주 거절을 했었습니다. 오늘은 은퇴를 할 날짜가 2달 26일이 남아서 오늘은 그래도 시청자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리고 그래도 목회를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부족하지 마는 나의 목회 생활의 과거를 더듬어 보면서 시청자 여러분들의 행복과 평안과 발전과 부흥을 비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 (총회장으로 봉사 많이 하시는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예 저는 55년에 신학에 들어갔다가 65년에 목사가 됐는데 지금부터 19년 전에 교단 내에 무슨 세속적인 운동이 지도자들에게 있다해서 그래서 총회에 총대가 되고 그때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총회 부서기로 당선된 후에 지금까지 여러 군데에서 신학교 이사장이나 찬송가 공회 대표회장이나 총회장까지 지내온 생활을 생각할 때 부족하고 어리석은 것으로만 보내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고 늘 겸손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남은 2달 동안 하나님께 맡기고 일을 잘해 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총회 총대로 나온 것은 25년 전입니다. 만 25년 동안 총대는 한번만 특별한 일로 못가고 그 외에는 만 25년을 나왔습니다. 3. (대성교회) 1967년 9월 9일날 제가 대성교회에 부임을 했었습니다. 오늘까지 2005년이니까 횟수로 39년이고 만으로는 38년 됐습니다. 그런데 되돌아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좋은 일은 그 자리에서 예배당을 3번 짓는 일하고 좋은 교단의 지도자들이 우리 장로님 중에 많이 났습니다. 선교사님들을 많이 파송하고 현재도 교회 예산의 적어도 20% 이상은 선교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아프리카나 이런데서 가장 훌륭한 선교사로 우리 교단에서 지목되고 있는 분들이 우리 교회 출신 선교사들입니다. 그리고 외국에 신학 공부하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그...

[서기행 목사] 전남 함평군 엄다면 영흥리 영천들 출생

1935년 10월 24일 전남 함평군 엄다면 영흥리 영천들에서 출생하였다(호적신고 기준). 실제출생은 1934년 8월 25일(음) 혹 24일 출생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영천에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영천들"에도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때 광복을 맞았다. 일제 강점기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말에 능통하였다. 초등학교는 집에서 4키로미터 떨어진 엄다면에 있는 엄다 초등학교다. 처음 교회를 다닌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다. 먼저 어머니와 양순(여동생)이 교회를 다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동생 양순이 광견에게 물려서 광견병으로 사경에 이르렀다. 죽었다고 생각하여 집 마당에서 관에 넣었다. 관이라고 해도 나무관이 아니라 간단하게 만든 관이었다.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한 양순이가 다시 살았다. 그리고 천국에 다녀왔다면서 할 말이 있다고 하였다. 예수님에 대해서 전할 때 반말로 하며 오늘 저녁에 전도하겠다고 하였다. 이 때 영흥교회에서 이신영 장로와 여러분들을 모셔서 듣게 되었다. 이신영 장로는 북에서 피난 온 전도사로서 이후에 목사가 되었다. 이신영 장로는 이원설 박사의 아버지다. 동생 양순의 기이한 전도로 양순 위로 8남매(6남 2녀)가 한날 한시에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누가 먼저 누가 나중 할 것 없이 온 형제가 믿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동생 양순은 이날 저녁 전도 후에 하늘나라에 갔다. 서기행 목사는 목사가 된 후에 동생 양순을 잊지 못하여 어린이 목회에 헌신하고자 하였으나 주신 은사가 다른 것을 깨닫고 일반적인 목회를 하게 된다. 집에서 600미터 정도 떨어진 영흥교회에 어머님이 새벽기도를 다니셨는데 어머님이 몸이 아프셨기 때문에 어머님을 돕기 위해서 새벽기도를 동행하였다. 사람들이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꺼리던 철길을 걸어서 교회에 다녔다. 영흥교회는 미국 남장로교선교부와 녹스(한국명 노라복), 니스벳(한국명 니스벳), 머피(한국명 민도마) 선교사 등의 전도사역을 통해 190...